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본의 성씨 (문단 편집) === 일본의 성씨와 고대 한반도의 영향? === [[원삼국시대]]·[[삼국시대]] [[백제]]를 비롯한 고대 한반도의 선진문화가 [[왜국|왜]]에 수출되었고 고대 한반도 국가들 중에서 어느 국가들보다 교역이 많았으며 [[도래인]]들도 많이 건너 갔다는 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사실이다. [[왜국|왜]]는 또한 국가 운영에 필요한 이념으로 기능하는 [[유교]], [[불교]], [[도교]] 등을 백제로부터 받아들였다. 백제가 유교를 왜에 전수해 주었다는 것은 [[근초고왕]]이 [[아직기]]와 박사 [[왕인]]을 왜에 파견하고 또 [[한자]], [[천자문]]과 [[논어]]를 보내주었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(372년 / 404년). 참고로 [[근초고왕]] 때 [[칠지도]] 또한 일본에 선물해주었다. 이후 백제는 [[무령왕]] 때 오경 박사 단양이, 고안무 등을 왜에 파견하여 유교 경전에 대한 이해를 높였다(516년). 이렇게 고대 한반도가 당시 왜에 한자를 가르치고 천자문을 보내주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 과정에서 한자로 된 지금 현재의 일본인들의 성씨 또한 고대 한반도, 그중에서도 특히 백제의 성씨 문화에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. [[무령왕|부여사마]](扶餘[* 송화강 일대에 있었던 국명에서 따온 성씨]斯麻), [[목라근자]](木羅斤資)[* 성씨인 목라(木羅)는 천안 일대에 자리잡았던 [[목지국]]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.], [[귀실복신]](鬼室福信), [[사타상여]](沙咤相如), [[흑치상지]](黑齒常之)[* 원래 부여씨였으나 흑치라는 봉토를 받고 지명을 성씨로 썼다고 한다. [[흑치상지]] 문서 참조.], [[명림답부]](明臨答夫), [[을지문덕]](乙支文德), [[연개소문|이리가수미]](伊梨柯須彌) 등[* [[귀실복신]](鬼室福信), [[사타상여]](沙咤相如), [[흑치상지]](黑齒常之), [[명림답부]](明臨答夫), [[을지문덕]](乙支文德), [[연개소문|이리가수미]](伊梨柯須彌)의 경우 '귀실', '사탁', '흑치', '명림', '을지', '이리'는 [[성씨]]이며 '복신', '상여', '상지', '답부', '문덕', '가수미'는 [[이름]]이다. 역사서에 이들의 [[성명]]이 복신, 상여, 상지등으로만 빈번히 기록된 것을 보면 생략된 앞부분은 성씨였음이 분명하다.]에서 보이듯 고대 한반도인들은 '''[[복성|두 자로 된 성씨]]와 두 자로 된 이름'''을 쓰는 경우가 상대적으로 흔했다. 그중에서도 백제는 유난히 복성이 많았는데, 당장 왕실부터가 부여(扶餘)씨로 복성이었고, 대성팔족 내에서도 진모(眞牟)[* 표기방식에 베리에이션(眞毛, 眞慕 등)이 심하지만, 음은 진모로 안정적인 편.]씨, 목라/목협(木羅/木劦))씨, 연비(燕比)씨 등의 복성이 존재했으며, [[백제멸망전]] 때도 숱한 복성 인물들이 등장하는 등 삼국 가운데서도 독보적으로 많은 복성 기록을 남겼다. 사학계 연구에 의하면 백제인들의 복성 문화는 지명(특히 자신의 봉토/영지의 이름)을 가문명으로 삼는 것에서 유래한 것이 많았는데, 대표적인 예시로 부여[* 송화강 일대의 국명/지명], 흑치[* 충남 예산 일대를 풍달군으로 비정하는 견해를 따를 경우], 귀실[* 익산의 방계 호족 귀실 가문을 무왕의 가문으로 보는 견해를 따를 경우], 계백[* [[계백]]장군의 본명을 계백승(升) 혹은 부여승(계백군에 봉토를 받은 방계 왕족이라는 견해)으로 보고, 오늘날 [[고양시]]의 옛 지명 계백을 영지명으로 보는 견해를 따를 경우] 등의 성씨를 지명에서 따왔다고 보는 견해가 존재한다. 백제가 멀쩡히 살아있던 당대의 일본 귀족들도 [[소가노 우마코]](蘇我馬子), 모노노베노 모리야(物部守屋), [[나카토미노 카마타리]](中臣鎌足) 등 복성 + 4글자 풀네임 조합을 쓰는 유사한 예가 많았고, 이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은 마찬가지로 지명에서 성씨(우지)를 따오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. 대표적인 예시가 소가(蘇我)[* 해당 가문이 영지를 갖고 있던 나라 지방의 소가천(蘇我川)이라는 강가의 지명에서 유래했다고 한다.], 츠쿠시(筑紫)[* 오늘날의 [[후쿠오카현]]에 존재하던 지명 혹은 국명], 키비(吉備)[* 오늘날 히로시마현 동부에서 효고현 서부 정도까지 이어지는, [[오카야마현]] 일대의 지명 혹은 국명], 오우미(近江)[* 오늘날 [[시가현]] 일대를 가리키는 지명, 혹은 그곳에 존재했던 국명], 카츠라기(葛城)[* 나라현의 지명], [[후지와라]](藤原)[* 마찬가지로 나라현의 지명] 등 셀 수 없이 많았다. 고대 일본인 뿐만 아니라 4글자의 이름을 짓는 전통은 중세 이후로도 이어져, [[호조 도키마사|북조시정]](北条時政)[* 호조(北条)는 이즈반도의 지명 혹은 장원의 명칭이다.], [[아시카가 다카우지|족리존씨]](足利高氏)[* 아시카가(足利)는 [[도치기현]]의 지명 혹은 장원의 명칭이다.], [[오다 노부나가|직전신장]](織田信長)[* 오다(織田)는 에치젠(오늘날의 [[후쿠이현]])에 존재했던 지명 혹은 장원의 이름이다.], [[도요토미 히데요시|풍신수길]](豊臣秀吉)[* 토요토미(豊臣)의 출전은 아직까지 명확하지 않다. <豊秀吉> 등의 기록이 남아있는 걸 보면, 귀족 가문이 아니었던 히데요시가 근본도 없이(카바네인 아손(臣)을 성씨의 일부로 착각해 넣었다든가, 영지명의 유래 없이 뜻이 좋은 글자(豊)를 대충 뽑았다든가) 멋대로 지었을 가능성이 있다.], [[도쿠가와 이에야스|덕천가강]](徳川家康)[* 에가와/도쿠가와(得川)씨에서 뜻이 좋은 글자로 바꾼 것이 유래다. 에가와(得川)는 코즈케 닛타 지방(오늘날의 [[군마현]])의 지명으로, 현대에는 아예 도쿠가와쵸(徳川町)로 이름이 바뀌어있다.], [[이이 나오스케|정이직필]](井伊直弼)[* 이이(井伊)는 토토우미(오늘날 [[시즈오카현]])에 있었던 지명이다.] 등 유명 역사인물들의 이름만 봐도 지명/본관명/영지명/봉토명에서 유래한 복성 + 이름 두글자로 이루어진 4글자 이름이 많다. [[고대 한국어|언어]]는 문화를 담아 나르는 그릇이고 고대 일본이 백제를 비롯한 고대 한반도의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, 고대 한반도 그중에서도 특히 백제의 성씨 문화가 일본에 동반 수출됐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. 다만 실제 일본에서 '''[[복성]]'''이 보편적으로 사용된 건 중세시대를 지나면서 '''기존의 성(姓) 대신 영지명인 묘지를 씨(氏)로 사용하게 되면서부터였다.''' 실제로 [[헤이안 시대]]로 접어들면서 당나라식 단성이 유행하기도 했다. 이는 헤이안 시대 최상위 귀족들의 성씨인 4대 본성 '겐페이토키츠(源平藤橘)'를 보면 알 수 있는데, 미나모토(源)씨, 타이라(平)씨, 타치바나(橘)씨가 한문으로 단성이고, 후지와라(藤原)씨조차도 등(藤)씨[* 예시: 등씨가전(藤氏家伝)]로 축약되어 불리기도 하는 등의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다. 19세기 [[메이지 유신]]으로 성씨 제도가 완전히 정착하기 전의 일본 귀족의 이름은 관직명, 영지명, 존칭 등을 다 붙여서 굉장히 복잡한 모습을 보이며, 혈족을 나타내는 우지조차도 단성(예: 하타 秦), 복성(예: 아베 安倍), 3글자 이상(예: 오시코치 凡河内) 등이 혼재했다. 현대 일본 성씨의 기원은 헤이안 말기 즈음부터 우지를 대신해 쓰이던 묘지인데, 묘지가 주로 두 글자로 이루어지는 경향[* 무사들의 경우, [[본관|조상이 하사받은 봉토]] 즉 지명에서 따오는 경우가 많았고, 지명은 한자로 두 글자로 쓰는 경우가 많았다(예시: [[오다 노부나가|오다織田]]=에치젠의 지명). 메이지 유신 시절 평민들이 성을 만들어낼 때도 타나카(田中: 밭의 한가운데), 야마모토(山本: 산 아래), 나카무라(中村: 남북 기준이든 동서 기준이든 중간 마을) 등 지리적 정보에 관한 한자 한 글자에 형용사 한 글자를 붙여 두 글자로 만들어내는 경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.]이 있었기 때문에 중세 이후 일본인의 성씨는 복성을 위주로 발전하게 된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